설찬범의 유토피아
연예인 화보, 쇼핑몰 화보, 걸그룹과 아이돌 화보, 수영복, 레깅스, 래쉬가드, 잡지 등
누구나 한번쯤 철학을 생각한다 (남경태)
반응형

누구나 한번쯤 철학을 생각한다 (남경태)



... 리오타르의 이론이 은연중에 미시적 혁명을 제시하는 데 비해, 보드리야르는 들뢰즈/가타리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혁명을 주장한다. 그런데 묘한 점은 그 혁명이 가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사실이다...


... 합리적 이성에서 출발한 근대사회는 '재현' 체계를 근간으로 삼았다. 재현representation이란 말 그대로 다시re 현실화presentation한다는 뜻이므로 원본의 존재를 전재로 한다. 즉 실재가 존재하고 그 실재를 모방한 이미지가 종속적으로 존재하는 이원론적 질서다. 사실 이런 질서는 근대적 산물이 아니라 플라톤의 이데아론 이래 서양 철학사 전체를 관류하는 사유방식이지만, 그것이 사유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근대에 생겨난 현상이다.

  이 재현 체계는 동일성, 통합성, 안정성을 기본으로 한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이원론인데 어떻게 통합과 안정이 가능할까? 이원론을 이루는 두 항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면 불가능하지만, 한 항이 다른 항을 종속시키는 불균등한 이원론이기 때문에 가능하다(플라톤의 일원론적 이원론을 상기하라). 즉 재현 체계 속의 이미지는 원본에 해당하는 실재를 사본처럼 반영한다. 사본의 품질은 원본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의해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재현 이미지는 실재와 비슷한 정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이것이 근대적 사유의 본질이다...


...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탈현대에 접어들어 그런 관계가 변화했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는 실재와 이미지, 원본과 사본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이원론이 사라지고 양자가 동일해지는 시뮬라크르(simulacre, 모방), 즉 시뮬레이션의 시대다(전체를 통괄하는 거대 담론이 무너지고 부분들이 독자적으로 작용한다고 본 리오타르의 입장과 통한다).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진 실재는 현실의 실재와 달리 가상이고 환상이므로 전통적인 실재처럼 사실성을 갖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기존의 실재 이상으로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며 오히려 기존의 실재가 했던 역할을 빼앗는다. 원본은 발언권을 잃고 사라진다. 원본이 없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은 '흉내 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 즉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미지가 된다. 이렇게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의 실재를 보드리야르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라고 부른다. 과거였다면 원본 없는 이미지는 공허하고 초라했겠지만, 현대사회에서는 현실을 대체하고 때로는 지배하기도 한다.

  현대의 전쟁이 그 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완전히 컴퓨터화된 현대식 미사일을 발사할 때 병사는 컴퓨터 화면 속의 이미지만을 상대한다. 물론 그 이미지는 현실의 미사일을 나타내고 있지만 병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미지 기호힐 뿐 그 지시 대상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화면상에서 미사일이 목표물에 명중하면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 것이다. 설사 미사일에 문제가 생겨 화면과 달리 실제로는 빗나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병사의 책임이 아니므로 그는 상관에게서 징계를 당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드리야르는 "걸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상징의 맥락에서 보면 1990년에 미국이 이라크를 대대적으로 폭격해서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낸 걸프 전쟁은 '비사건non-event'이고, 2001년에 여객기 두 대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강타한 9.11 사태는 '절대적 사건absolute event'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실재를 스스럼없이 이미지로 대체하는 관계를 경제학에도 적용한다. 이미지와 현실의 새로운 관계를 확장하면 전혀 새로운 개념의 경제학이 탄생한다. 아무리 가상 세계가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이라 해도 그 근저에는 현실이 있다. 인터넷 쇼핑몰을 서핑하는 궁극적 목적은 그 가상 세계에 전시된 현실적인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인터넷 게임의 가상 캐릭터에 열광하는 이유는 결국 현실에 존재하는 나의 정신과 신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이렇듯 이미지의 세계는 현실 세계를 반영하며, 현실 세계로 피드백되어야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하이퍼리얼리티의 현실에서 이미지 기호들은 현실과 교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기호들은 기호들끼리 서로 교환된다. 바로 여기서 기존의 정치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사용가치나 교환가치와 다른 기호가치의 개념이 나온다.

  루이비통 핸드백이 여느 핸드백보다 특별히 사용하기 편리하다거나 더 많은 물건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롤렉스 시계보다 시간이 정확하고 기능이 많은 시계는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루이비통 핸드백과 롤렉스 시계가 사용가치의 면에서 여타의 핸드백이나 시계보다 우월한 요소는 전혀 없다. 탈현대에 이른바 '명품'의 효과는 실용성, 간편성, 아름다운 디자인 같은 고전적인(아울러 근대적인) 가치에 있는 게 아니라 소유자의 부와 지위를 나타내는 기호가치에 있다(그러므로 명품을 가지려는 욕구는 그냥 속물적이고 천박한 게 아니라 기호가치에 대한 욕구다). 더구나 이 기호가치는 결코 관념적이거나 비실용적인 게 아니다. 기호가치는 일류 호텔의 레스토랑이나 고급 백화점에 들어갈 때, 심지어 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갈 때도 소유자에게 현실적인 이득을 가져다준다. 루이비통 핸드백과 롤렉스 시계로 무장한 부부가 문전박대를 당할 가능성은 없으니까.

  자본주의 초창기에 마르크스가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를 중시한 것은 혁신적 관점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그 두 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중시한 보드리야르의 관점은 또 하나의 중대한 혁신이다...


...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혁명도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인 혁명과는 크게 다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는 가치를 생산하는 유일한 수단인 노동을 핵심 개념으로 삼지만, 기호의 정치경제학에서 볼 때 노동은 실재적인 힘이 아니라 여러 기호 중 하나에 불과하다. 보드리야르는 노동에서 본질적인 것은 생산이 아니고 그에 선행하는 코드화, 표시화, 억압의 기능이라고 본다. "모든 노동은 기본적인 억압, 통제, 규칙의 묶음이며 장소와 시간에 얽매인 일이라는 형태로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코드에 따라 생활 전체에 침투한다." 물론 노동이 전통적 의미에서의 경제적 생산을 아예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보드리야르의 의도는 그런 노동의 의미가 점차 축소되고 노동의 초점이 코드와 규범의 재생산으로 이동하는 것을 밝히려는 데 있다...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